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문단 편집) == 연합군의 진격 == 젤라 전투 이후 [[조지 S. 패튼|패튼]]은 교두보 북쪽에 위치한 고지대를 정리하기 위해 미 1사단과 3사단을 보내 1사단이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을 상대하는 동안 제2기갑사단의 지원을 받은 3사단이 니셰미(Niscemi)를 점령하고, 젤라 서쪽에 위치한 리카타를 점령해 1차 목표였던 옐로 라인까지 진격한다. 영국군도 이에 보조를 맞추어 진격해 연합군은 13일 무렵에는 동쪽으로는 아우구스타, 서쪽으로는 비치니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지형상 진격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데다 프랑스로부터 독일군 정예인 제1팔쉬름예거 사단이 증파되었기 때문에 돈좌된 상태였다. 지지부진한 진격에 넌덜머리를 낸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해럴드 알렉산더 장군에게 패튼의 미 7군과의 서쪽 [[전투지경선]]을 조금 수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즉, 지금 적의 방어선이 굳건하니 적의 방어선을 우회해서 시칠리아 중부로 찔러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7월 13일 자정에 알렉산더 장군은 패튼 장군에게 전투지경선의 변경을 통고했고 미 7군은 124번 고속도로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영국 8군의 일부가 124번 고속도로를 통해 엔나로 진격했다. 엔나는 중부 시칠리아로 진입하기 위한 중요한 길목이었고, 북동쪽 메시나로 진군하기 위해 필요한 지역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알렉산더 장군은 노골적으로 영국군을 미군과 독일군 사이에 끼워 넣어 메시나를 먼저 탈환함으로써 시칠리아 해방의 공로를 독차지하려는 의도를 내보인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미 7군은 영국군의 서쪽 측후방을 지켜줄 수 없게 되었는데다 영국군이 대놓고 미군 햇병아리들은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내보인 셈[* 위의 피해 규모만 참고해도 알겠지만 전혀 근거없는 편견이었다. 어찌 보면 영국군보다 훨씬 잘 싸웠다.]이라 그 성질머리 더러운 패튼의 속은 부글부글 끓게 되었다. 더군다나 124번 고속도로로 잘 가고 있던 미군을 강제로 끌어내고 영국군을 보낸 참이라 카타니아에서 엔나로 이어지는 추축군 방어선이 구축될 시간이 생겨버렸다. 결국 그대로 미 7군에게 맡겨두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고, 알렉산더 본인이 승인을 내리기는 했지만 몽고메리가 강하게 주장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패튼은 몽고메리에게 이를 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